1970년대는 북한 고고학이 본격적으로 주체사관이라는 이념 아래 정치화되는 시기였다. 고고학은 더 이상 유물과 유적을 단순히 조사하고 분류하는 학문이 아니었으며, 김일성 중심의 역사관과 체제 선전의 도구로 기능하였다. 이 시기 고고학은 조선민족의 ‘우월한 기원’을 강조하고, 외세에 대한 독립성과 민족 중심의 연속성을 실증하려는 이념적 도구로 자리잡는다. 본 글에서는 1970년대 북한 고고학의 주요 특징, 주체사관의 영향, 유물 해석의 변화, 대표 유적 발굴 사례 등을 중심으로 고고학의 이념화 과정을 조명한다.
1. 주체사관의 등장과 고고학의 재정렬
주체사관은 김일성이 직접 제창한 북한 고유의 역사철학이며, 모든 학문과 사회 활동을 김일성 중심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사상이다. 1970년대 초반, 김일성은 “역사도 고고학도 우리식으로 써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고, 이에 따라 학문 전반에 대한 이념 일원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고고학은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북한은 고대사에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까지의 모든 과정을 주체적 역사 발전의 산물로 해석하며, 그 증거로 고고학 자료를 활용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고려 등의 유산은 민족 자주의 증거로 강조되었고, 외세의 영향은 축소되거나 부정되었다.
2. 단군과 고조선의 신격화
이 시기 단군은 단순한 건국 영웅을 넘어, 김일성에 이르는 민족 지도자의 기원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북한은 단군을 “조선민족 최초의 위대한 영도자”로 규정하였으며, 단군릉은 ‘민족의 성지’로 격상되었다.
북한 고고학자들은 단군이 단지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실존 인물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였고, 단군 시대의 유물이라 주장되는 유적들이 연이어 보고되었다. 특히 단군릉 발굴에서 출토된 뼈조각, 토기 파편 등이 ‘과학적으로 단군 시대의 것’이라며, 조선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다는 주장이 학계와 대중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확산되었다.
3. 유물 해석의 정치화
1970년대 북한 고고학의 특징은 유물 해석 방식의 이념화에 있다. 이 시기 북한은 유물의 시대나 기능을 분석할 때, 그것이 계급 사회의 발전 단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예를 들어, 철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무기류는 단순한 전쟁 도구로서가 아니라 ‘노예 지배 계급의 통치 수단’으로 해석되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복장이나 장식품도 ‘지배 계층의 생활상’으로 분류되어 사회계급의 발전 단계와 연결되었다.
이처럼 모든 유물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역사발전 단계론에 따라 해석되었고, 학문적 객관성보다는 정치적 타당성이 강조되었다. 유물은 과학적 분석보다는 체제 정당화를 위한 증거로 기능하였다.
4. 대표적 유적 발굴: 안악고분군과 고구려 유산
이 시기 북한은 고조선뿐 아니라 고구려 유산 발굴에도 적극적이었다. 대표적으로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안악3호분은 1970년대 고고학의 중심 발굴지 중 하나였다. 이 벽화고분은 화려한 색채와 고구려인들의 복식, 무기, 무용 장면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북한은 이를 ‘고구려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자료로 제시하였다.
북한은 안악3호분의 벽화를 세밀하게 복원하고, 이를 교과서와 박물관, 방송에 지속적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평양의 대성산성과 정릉사 일대 고구려 유적도 발굴되어, 고구려가 평양에 도읍했으며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한 국가임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북한의 해석에 따르면 고구려는 단군 조선 이후 민족의 주체성을 이어받은 국가이며,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자주적 역사로 상징되었다. 이를 통해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 역시 고대의 자주적 전통을 계승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5. 고고학 교육과 대중화 전략
1970년대 들어 북한은 고고학 지식을 대중에게 확산시키는 데에도 집중하였다. 초·중등 교육과정에는 단군 조선과 고구려의 역사와 유산이 체계적으로 편입되었으며, 고고학 발굴 과정은 ‘노동신문’, ‘조선중앙TV’를 통해 자주 보도되었다.
고고학 관련 전시회와 특별 강연도 빈번하게 개최되었고, 지역별 박물관은 지방 고대 유산을 민족사의 일부로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다. 주민들은 유물 보호 운동, 유적 발굴 참여 등의 활동에 동원되었으며, 이러한 참여는 ‘애국 충정’의 실천으로 간주되었다.
고고학은 학문이자 동시에 민중을 계몽하고 체제 충성을 유도하는 이념적 활동이 되었으며, 이는 1980년대에 더욱 강화된다.
6. 남한 및 해외 학계와의 괴리 심화
이 시기 북한 고고학은 남한 학계와의 거리뿐 아니라, 국제 학계와의 학술적 교류도 거의 단절되었다. 북한은 자국의 고고학 이론이 가장 정확하고, 외세 중심의 역사해석은 모두 식민사관에 기반했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락랑군 유적이나 단군릉에 대해 해외 학자들이 제기한 비판에 대해 북한은 “민족을 모독하는 적대 행위”라고 규정하며 강경 대응하였다. 이후 북한은 고고학 자료의 공개를 점점 제한하고, 자국 내 해석만을 유일한 진실로 규정하는 폐쇄적 학술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1970년대는 북한 고고학이 단순한 민족사 연구를 넘어, 국가 이념을 실현하는 도구로 정착된 시기였다. 주체사관은 학문 전반을 지배하며, 고고학은 정치적 정당성과 민족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수단이 되었다. 고조선과 고구려 중심의 유산 해석, 단군 실존 주장, 그리고 유물의 계급적 해석 방식은 모두 이념에 기초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1980년대 주체사관의 극대화로 이어지며, 북한 고고학은 체제 선전의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