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북한은 국가 전반에 걸친 복구 사업을 전개하면서 학술 분야도 빠르게 재편하였다. 특히 고고학은 전쟁 이전부터 추진되던 민족 중심 역사 재구성의 핵심 수단으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 북한 고고학은 본격적으로 고조선 중심주의를 강화하며, 역사학과 고고학의 이념화를 구체화한 시기이다. 본 글에서는 전후 복구 과정에서 고고학이 체계화된 흐름과, 고조선 실증을 위한 발굴 및 제도적 정비 과정을 살펴본다.
1. 전후 복구와 학문 체계 재정비
전쟁 직후 북한은 모든 국가 기관의 재건과 더불어 학문 조직을 구조적으로 재편하기 시작했다. 고고학은 단순한 문화재 복원 사업이 아닌, 민족 자긍심을 고취하고 체제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과업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 북한은 고고학을 역사학의 하위 개념이 아닌 정권의 역사 철학을 실현하는 도구로 규정했다.
조선과학원 역사연구소는 조직을 확대하며 본격적인 발굴사업을 시작했고, ‘력사학과 고고학’은 학문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채 통합적으로 운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석형, 황영식 등 해방 직후부터 활동해온 연구자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2. 고조선 중심주의의 제도화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고조선은 조선민족의 기원이며, 고대 문명의 출발점이라는 주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역사적 탐구가 아니라, 체제 정당화와 민족사 서사의 재구성이라는 목적 아래 추진되었다.
고조선 중심주의는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따른다.
- 고조선은 단군이 세운 최초의 민족국가
- 고조선은 기원전 30세기부터 존재하였으며, 오랜 국가 전통을 자랑함
- 중국 중심의 동북공정이나 남한 학계의 낙랑군설은 제국주의적 사관의 산물
- 고조선의 영토는 현재의 북한과 만주 일대를 포괄함
이러한 서사는 북한 고고학의 방향성을 결정지었으며, 이후의 모든 발굴과 연구는 고조선의 실체를 실증하고, 단군의 실존을 역사화하는 데 집중되었다.
3. 주요 발굴 사업과 성과
195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평양 일대에 집중하여 고조선 유적지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가장 상징적인 작업은 대성산 유적지 발굴과 단군릉 복원 작업 착수였다.
대성산은 고구려 시대 유적이 다수 분포한 지역이지만, 북한은 이 지역에서 고조선 계통의 석곽묘와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발표하며 고조선의 수도 평양설을 공식화했다. 이에 따라 평양은 단군이 수도를 건설한 지역이며, 고조선의 중심이자 조선민족의 발상지라는 서사로 확대되었다.
또한 북한은 ‘단군릉’을 황해북도 강동군에 위치한 봉분을 단군의 무덤으로 지정하고, 1956년부터 복원에 착수하였다. 이는 단군을 실존 인물로 제도화하려는 상징적 조치로, 이후 1990년대 대규모 재단장으로 이어진다.
4. 역사 발전단계 이론과 고고학의 결합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사회발전 단계론과 고고학 해석의 결합이다.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유물사관에 따라, 조선민족의 역사도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쳤다고 규정하였다.
- 원시공산사회
- 노예사회 (고조선)
- 봉건사회 (고구려, 고려, 조선)
- 식민지 반봉건사회
- 사회주의
이에 따라 고고학 유물은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입증하는 자료로 기능하였다. 예컨대, 고조선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기 무기나 돌무덤은 ‘노예지배 계급의 출현’ 증거로 해석되었다. 이런 해석은 고고학의 과학적 분석보다는 정치적 방향성을 우선시하는 방식이었다.
5. 남한 학계와의 괴리의 시작
1950년대 후반, 북한의 고조선 중심주의는 이미 남한 학계와 본격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남한은 이병도, 신석호 등의 실증사학 전통에 따라, 고조선을 기원전 10세기 이후의 국가로 보았으며, 단군 신화를 역사로 보지 않았다. 또한 낙랑군을 한사군의 중심이라 보았고, 평양 일대에 중국계 문화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반면 북한은 낙랑군이 고조선의 일개 지방 정권이며, 중국 한나라의 직접 지배는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차이는 이후 1960~70년대에 더욱 격화되며, 역사 해석의 분단이 학문 영역에서도 제도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6. 교육 및 대중 홍보로의 확산
고조선 중심주의는 단지 연구자들 사이의 학술적 담론에 그치지 않았다. 북한은 이 사관을 교육과 문화 콘텐츠에 반영하여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주입하였다.
초등학교부터 대학 교육과정까지 단군과 고조선은 민족 자긍심의 출발점으로 교육되었으며, 어린이 잡지나 라디오 방송, 포스터, 벽화 등을 통해 단군신화가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 고고학은 체제 선전과 민족주의 고취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전면 등장한 것이다.
1953-1960년대 북한 고고학은 전쟁 이후 국가 재건과 함께 체계적이고 이념적인 방향성을 갖추기 시작한 시기였다. 고조선 중심의 역사 재구성은 학문적 성과이자 정치적 메시지였고, 이후 북한 고고학의 핵심 뼈대가 되었다. 이 시기는 북한 고고학이 본격적으로 정치·이념적 목적에 봉사하게 되는 시작점으로서의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