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북한 고고학은 체제의 사상적 정비와 함께 본격적인 이념 강화를 목적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특히 고조선 중심의 역사관을 실증하기 위한 발굴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그 중심에는 ‘단군 실존의 역사화’와 ‘중국 한나라 지배설 부정’이라는 두 축이 있었다. 본 글에서는 1960년대 북한 고고학의 대표적 유적지인 락랑토성 재해석을 중심으로, 단군 실존 증명을 위한 국가 차원의 고고학 정책을 살펴본다.
1. 고고학의 국가 전략화
1950년대 후반 고조선 중심주의를 정립한 북한은 1960년대에 들어 이를 더욱 강화하며 고고학을 국가 전략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김일성 체제는 고대사 실증을 통해 북한의 민족적 정통성과 우월성을 입증하려 했으며, 이는 곧 정치적 안정과 대내적 결속을 위한 사상 선전 도구로 기능하였다.
이 시기부터 고고학 발굴 사업은 단순한 유적 조사 차원을 넘어, 이념과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수단이 되었고, 모든 유물과 유적은 민족 중심 해석 체계 안에서만 평가되었다.
2. 락랑토성 재해석: 북한 고고학의 분기점
북한 고고학이 이 시기 중점적으로 다룬 대상은 평양시 낙랑구역의 락랑토성이다. 이 유적은 일제강점기부터 ‘한나라의 낙랑군 치소’로 여겨졌으며, 남한 학계 역시 이를 계승하여 중국계 한사군 유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락랑토성을 고조선 후기 내지 고구려 초기의 토착 유적으로 해석했다. 북한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락랑은 고조선 혹은 고구려의 지방 행정 단위였으며, 외세의 식민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 중국식 유물이 출토된 것은 교역의 결과일 뿐, 지배의 흔적은 아니다.
- 토성 구조, 무덤 양식, 출토 토기의 양상 등에서 조선식 특징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해석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중국 중심 역사관을 반박하는 정치적 목적을 포함하고 있었다.
3. 고고학적 근거 조작 논란
북한은 락랑토성을 발굴하며 조선계 유물로 분류된 다양한 유물 목록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청동 거울, 철제 무기, 도자기 등이 포함되며, ‘고조선 유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다수의 외부 학자들은 이 유물들이 명백한 중국계 유물이며, 이를 단순히 조선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오수전(五銖錢) 동전, 한나라식 인장, 중국식 청동기가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이를 무역품으로 간주하며, 식민 지배의 흔적이 아님을 강조했다.
결국 북한 고고학의 해석은 발굴 사실 자체보다 해석 프레임의 문제로 이어졌으며, 과학성과 정치성 사이의 긴장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대표 사례가 되었다.
4. 단군 실존 증명의 강화
1960년대 후반, 단군릉 복원 사업이 본격화되며 단군을 역사 인물로 고정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단군릉은 강동군 문흥리에 위치한 봉분 형태의 무덤으로, 북한은 이를 ‘단군과 그의 비의 무덤’으로 규정하고 발굴 및 복원을 추진하였다.
북한 당국은 이 무덤에서 발견된 치아와 뼈 조각을 유전자 분석 없이 단군의 유골이라고 선언하였다. 당시 발표된 내용을 보면, “발견된 유골은 3,011년 전 단군왕검이 이 땅에 국가를 세운 증거”라고 하며, 단군의 실존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고고학적 검증 절차 없이 정치적 명분에 의해 결론이 정해진 구조로, 단군의 실존 여부를 과학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상징화하려는 국가적 의도가 더 강하게 작용하였다.
5. 유물 분류와 명명 방식의 변화
이 시기의 북한 고고학은 기존에 사용하던 문화유형론적 분류 대신, 계급사회 발전 단계에 따른 유물 명명법을 도입했다. 예를 들어, 청동 단검이나 방패 등은 단순히 청동기 문화로 분류되지 않고, “노예 지배 계급이 사용한 무기”로 해석되었다.
이는 유물 자체의 형식이나 제작 기법보다는, 사회적 의미와 계급적 관계를 중시한 마르크스주의 사관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같은 유물이라도 북한의 해석 방식은 정치-사회 구조를 반영한 해석으로 특징지어진다.
6. 대외 관계와 학술 고립
북한 고고학은 1960년대에 이르러 국제 학계와의 학술적 단절이 확연해졌다. 락랑 유적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중국, 일본, 남한 학계와 정면으로 충돌하였고, 이에 대한 비판이 외부에서 제기되자 북한은 고고학적 자료를 점차 공개하지 않기 시작했다.
북한은 외부 비판에 대해 “민족사에 대한 왜곡과 침탈 시도”로 규정하며, 자국의 고고학 해석만을 유일한 진실로 강변하는 구조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 더욱 심화되어, 북한 고고학의 폐쇄성과 독자성이 학술적으로 고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는 북한 고고학이 정치적 방향성을 본격적으로 실현하는 시기였다. 락랑토성의 재해석은 단순한 유적 해석이 아니라, 역사 서술의 주도권을 쥐려는 체제적 기획이었다. 또한 단군 실존 주장과 고조선 중심주의는 고고학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고, 체제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